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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안내 > 선유도이야기 > 선유도전설 > 신시도 임씨할머니전설
 
 


신시도는 신라시대의 대학자인 최치원 선생과 근세의 대유학자인 전간제 선생이 일시적으로 거주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 신시도는 해발 199미터의 월영봉은 선유8경의 하나로 가을이면 한폭의 동양화같은 단풍이 장관을 이루어 여행자의 시심을 절로 불러 일으킨다고 한다.


 

고군산 군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섬으로 신라초기에 본 신시도 주변에 풍성한 청어를 잡기 위하여 김해김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여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신시도는 신라시대의 대학자로 명성을 떨친 최치원선생이 일시나마 살았던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선생이 신시도를 찾게 된 연유는 옥구군 옥구면에서 한동안 서원을 차렸을 때 해변가인 하제에서 서해를 바라보다 신시도의 우뚝 솟아있는 월영봉을 쳐다보고 곧바로 명산이라고 칭찬을 하면서 뗏목같은 풍선(風船)을 타고 신시도에 도착 월영봉에 올랐다는 것이다.


최치원선생의 자는 고운 또는 해운이라고 부른다. 월영봉에 오른 고운은 그곳을 월영대라 칭하고 돌담을 쳐 거처를 만들어 놓고 때로는 생식을 하며 글을 읽었다고 한다.

해발 199m 인 월영봉은 선유8경의 하나로 가을이면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단풍은 장관을 이룬다. 주민들은 너나없이 한폭의 동양화를 대표한다고 한다. 신시도 주민들이 이월영대를 찾아 글을 읽은 최치원선생의 자가 고운이었음에도 해운이라는 자하나를 지어 부르게하여 신시도를 영원히 연상케 했다고 한다.

최치원선생의 글 읽는 소리가 중국 남경까지 들렸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올 만큼 큰 소리로 글을 읽기도 하였지만 주변의 공기가 맑고 깨끗한 자연속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잊어버리고 자연을 벗삼아 생활하였음을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때는 신시도 마을 청년들이 고운의 뜻을 기리고 지키기 위하여 고운이 글 읽었던 곳에 흔적이 남아 있는 돌담을 손질 보존하고 있을 정도로 고운이 이섬에 살았던 것을 마을사람들은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고운은 경주최씨의 시조요 857년(신라 헌안왕 1년)에 태어났다. 경문왕 9년 869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과거에 급제하고 선주표수현위가 되었다. 또한 승무랑시어사내공봉에 올라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879년(헌강왕5년)에는 황소의 난에 제도행영병마도통 고변의 종사관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았다. 당시의 표장, 서계, 격문은 모두 고운에 의해 지어졌는데 특히 토황소격문은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운은 885년에 귀국 시독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함을 통한 외직을 청원하여 대산, 천령, 부성등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 진성여왕 7년에는 견당사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횡행하여 가지못하고 이듬해 시무 10여조를 상소하여 시행케하고 아찬이 되었다.

그후에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행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고운은 명필로도 유명하여 그의 난랑비서문은 신라시대의 화랑도를 해설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학자요 벼슬을 지내고 당대의 석학 및 대문장가로서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해주는 고운이 신시도까지 찾았다는 것을 신시도 마을 사람들은 높은 긍지를 갖는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신시도에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있는데 신시도의 최고 상봉인 월영봉 옆에는 해발 187m의 대각산이 있다. 이 대각산 줄기가 용의 형국을 하고있다고 하는데 용머리 옆을 약간 빗긴 중간에 임씨할머니 묘터가 지금도 있다고 한다.

 

신시도에 임씨성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임씨가 딸을 낳았는데 그 딸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손가락을 펴지못하고 양손 모두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처녀가 될 때까지 손바닥을 한 번도 펴보지 못하고 주먹을 쥔채 스무살을 넘기게 되었다. 부모들은 이 딸을 시집 보내기로 하고 정혼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날 뜻밖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집안에서 지관을 대어 바로 신시도에 있는 대각산 줄거리 용머리 옆에 묘자리를 결정했다.


지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부들이 묘쓸곳을 파기 시작하여 얼마쯤 파들어 가고 있는데 갑자기 뿌연 연기 같기도 하고 흰구름같은 것이 돌더니 흰학 한마리가 깃을 펄럭이며 날다가 그만 떨어지더니 죽어버리더라는 것이다.

너무도 이상히 여긴 집안식구와 동네사람들은 웬일인가하고 모두들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딸이 갑자기 쓰러지며 숨졌다. 아버지 묘자리를 파다가 학이 나오더니 날다가 죽었는데 이를 지켜본 딸이 또 죽었으니 온통 동네가 난리가 난 것이다.

딸은 그때까지 펴지지 않던 주먹이 펴졌는데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친척과 주민들이 죽은 딸의 손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손바닥에는 王자가 그려져 있었다. 더욱 큰 소동이 벌어진 것은 당연했다.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모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렇게도 펴보려해도 펴지지 않았던 손가락이 죽자마자 펴진데다 묘자리에서 학이 나와서 죽고 펴진 손바닥에는 王자가 새겨져 있었으니 온 마을 사람들은 죽은 딸은 여왕이 되던지 아니면 최소한 왕비가 되려던 인물이 죽었다고하여 동네가 온통 통곡소리로 꽉 메워졌다. 그러자 시집갈 때 쓰려고 기르던 큰 돼지 8마리가 다음날 모두 죽어 버리는 일이 또 발생했다.

그리하여 임씨처녀를 학이 나온 그 자리에 묻어주고 아버지 임씨는 그옆에 묻어주었으며 돼지들은 부락 뒷산 마루에 묻어 주었다. 지금 이무덤의 흔적은 없으나 그때 처녀로 죽은 딸은 수백년을 내려오는 동안 임씨 할머니라 불리어지고 있다.

신시도에는 한국 유학의 대학자 田良濟선생(1841∼1922년)이 찾아 한동안 머물면서 흥학계(興學契)를 조직 한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1910년 한일합방후 일본인과의 만남이 싫어 이를 피하기 위하여 신시도에 잠시 살면서 섬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것이다. 흥학계는 당시 신시도 젊은 이들에게 유일한 배움의 길잡이가 되었다.


전간제는 흥학을 통해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을 찾아야하며 배움이 없이는 적과 싸울수도 없고 대항조차도 할 수 없는 만큼 글을 읽히는데 게으름 없이 따라 줄것을 당부했다.

따라서 중요성을 체험해온 주민들은 몇십년을 통해 내려오는 동안 서당방을 운영해왔으며, 배움의 열기는 신학문의 필요성으로 일찍 제기되어 1943년 신시도 공립초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44년에 개교 현재까지 존치하고 있다.

신시도가 신라초기에는 문장현 심리, 또는 신시로 불리어 오던것을 일제때에 신시도라 개칭하였다.

신시도에는 고려 장터가 여러곳에 있다고 한다. 신시도 주민들에 의하면 20여년전 호리꾼들이 이 섬을 찾아와 오래된 무덤을 파헤쳐 여기에 묻혀있는 유물들을 꺼내갔다고 하는데 호리꾼들에 의해서 파헤쳐진 무덤들을 고려장이라고 부르며 지금은 메꾸어지고 흔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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